하원은 일본 야마구치에서 열렸던 강연회에서 ‘Wish Flow’라는 제목으로 전시한 자신의 설치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은 중국의 철학자인 장자(荘子)를 알고 계십니까? 이 작품은 장자의「소요유(逍遙遊)」에서 착상을 얻은 것입니다. 逍遙遊는 逍–소요하다, 遙–거닐다, 遊–아득하다 라는 세 문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는 이 가운데서 세 번째 문자인 ‘遊–아득하다’를 ‘流–흐르다’로 바꾸었습니다. 한국어에서 「遊」와「流」는 동일하게 「유」로 발음되므로, 음이 같은 ‘流–흐르다’라는 한자로 대체한 것입니다. 종이로 접은 배를 강바닥의 작은 조약돌처럼 빼곡히 깔고 마치 강물이 흘러가듯이 문자로 제작한 영상을 그 위에 투영한 작품입니다.”
「소요유(逍遙遊)」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속되지 않고 유유자적한 융통무득(融通無碍)의 경지에서 여유롭게 즐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장자가 이상으로 삼은 경지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보면 「소요(逍遙)」란 방향을 정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대지 위를 산책하면서 즐기는 것으로 생각할 지도 모르나, 사실 그것만은 아니다. 장자의 「소요(逍遙)」는 대지를 밟으며 산책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중공(中空)에 부유(浮遊)하고 물 위를 부양(浮揚)하는 이미지에 가깝다. 「무용(無用)의 용(用)」을 설명한 「소요유(逍遙遊)」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나무를 지고 힘에 겨워 한탄하는 중생을 보고 장자는, “당신은 왜 그 나무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허벌판에 심어서 즐기려고 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곳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무를 심어 마음으로 흡족해 하고, 그 주변에서「소요평(逍遥乎)」으로 엎드려 잠들면 좋지 않겠는가”라고 장자는 말하고 있다. 대지에 잠을 자며 뒹굴고 중공에 떠돌며 물 위를 부양하는 것을 바로「소요(逍遙)」로 묘사한 것이다. 장자를 연구하는 어느 학자는「소요(逍遙)」에 「마음을 맡기다」라고 절묘한 해석을 하기도 하였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는 「소요유(逍遙游)」로 기술된 별책으로도 존재하였음을 『경전석문(経典釈文)』이 전하고 있다. 또한 예전에는 환각상태에서의 몽롱하고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광유(恍遊)」라고 하는데 이것도 「광유(恍游)」로 기술하기도 하였다. 「遊」와「游」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 다른 글자인데 한국어에서는 「流」와 같이 「유」로 발음된다. 게다가「游」의 부수(部首)는 물수(氵=水)이며, 물결의 흐름에 몸을 맡겨 기분 좋게 유유자적하는 모습을「遊」보다도 더 명확히 표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원이「遊」를「流」로 변경한 착상은 매우 흥미로운데, 장자의 사상과 보다 깊은 곳에서 본질과 은연 중에 연결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시장을 방문한 관객들은 한 장의 종이에 자신의 소망을 적은 후 그 종이로 배를 접어 전시장의 마음에 드는 곳에 놓아 두게 된다. 마치 강바닥의 작은 조약돌처럼 빼곡히 들어찬 종이배는 안이 모두 비어 있다.
장자의 외편(外篇)인 산목편(山木篇)에는 그 유명한 「빈 배(虛舟)의 비유)」에 관한 일화가 있다. 이 외편에는 장자의 사상과 양립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이 많은 학자로부터 지적되어 왔는데, 이 이야기 또한 극히 세속적이며 공리적인 의도가 포함되어 있어 장자 특유의 탈세속적인 재미가 결핍되어 있기는 하지만 「허주 (虛舟)」라는 비유가 갖는 의미 그 자체는 순수하게 장자적이라고 할 수 있다. 허주(虛舟)란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빈 배를 의미한다. 배가 비어 있기 때문에 이 배는 모든 것에 대해 열려 있으며, 그 어떤 것도 실을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 쓸모없는 나무조차도 받아들일 수 있는 허허벌판, 우주와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빈 배는 「소요유(逍遙游)」의 경지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종이로 접은 허주「虛舟」 또한 어떠한 소원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사람도 물건도 실어져 있지 않은 빈 배에는 이 배를 접은 사람의 소원만이 문자로서 각인되어 있다. 이 배의 유일한 승객은 사람이나 물건이라는 실체가 아닌 소원이 적힌 문자이다.
실체는 아니지만 가상적 실체로서의 문자는 천정에 설치된 프로젝터를 통하여 스크린을 대신하는 종이배(虛舟)들 위에 투영된다. 문자의 그림자는 강물이 흐르듯이 스크린 위를 지나간다. 스크린이 입체이기 때문에 문자의 그림자는 명확한 윤곽을 지니지 않는다. 윤곽을 흐리는 옅은 그림자와 서로 엉키면서 문자의 그림자는 종이배의 형태와 배치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일렁거리며 흘러 지나간다.
이 설치작품의 구조는 또한 장자의 유명한 「망양문경(罔兩問景)」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경(景)은 실체인 그림자이며 망양(罔兩)은 그림자의 주변에 흐릿하게 형성되는 옅은 그림자이다. 그림자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망양은 망양 자신의 실체인 그림자를 향해 자신의 분수도 알지 못하고 그림자가 주체성이 없음에 대해 책망한다. 그림자는 실체가 움직이면 따라 움직이고, 멈추면 같이 멈춘다. 스스로 서거나 앉지도 못한다. 그림자의 움직임에 따를 수 밖에 없는 망양이 ‘아무런 지조도 없다’고 불만을 터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림자 또한 망양처럼 실체를 향해 힐문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의 대답은 다르다.
그림자는 말한다. 나는 다른 것이 내가 할 것을 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내가 기다리는 다른 것 또한 그것이 할 것을 하는 또 다른 것을 기다린다. 나의 기다림은 뱀의 비늘 때문인가? 혹은 매미의 날개 때문인가? 어떻게 내가 왜 한가지 일은 하며 다른 것은 하지 않는가를 알 수 있겠는가?
The Shadow replied, ‘I wait for the movements of something else to do what I do, and that something else on which I wait waits further on another to do as it does. My waiting, is it for the scales of a snake, or the wings of a cicada? How should I know why I do one thing, or do not do another? 그림자는 말한다. 나는 기다릴 뿐, 책망하지는 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도 影は言う「吾は待(たの)むものありて然(しか)する者か。吾が待(たの)む所も又待(たの)むものありて然(しか)する者か。……惡(いづ)くんぞ然(しか)る所以(ゆえん)を識らん、惡(いづ)くんぞ然らざる所以を識らん」이라고.
그림자는 무엇인가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을지도 모르며, 그 무엇 또한 다른 차원의 다른 무엇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왜 그런가, 또는 왜 그렇지 않은가는 그림자가 염려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림자는 단지 자연의 이치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망양(罔兩) 이기도 하고 실체이기도 하며, 또한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림자는 마치 장자가 이상으로 하는「逍遙游」의 경지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원의 또 다른 작품 「A Drop of Sky」는 장자의 「나비의 꿈」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다. 나비가 되어 즐겁게 날아 다니는 꿈을 꾸던 장주(荘周)-장자(荘子)는 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나비가 아닌 주(周)인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비가 주(周)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나비의 꿈」이라는 기발한 상상이 인기를 끌게 된 후, 이 일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하게 인용되어 해석되어 왔다. 청대의 소설가 장호(張潮)는 그의 『유몽영(幽夢影)』에서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는 것은 장자의 행복이며, 장자가 되는 것은 나비의 불행”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나비에게 있어서는 장자로 되는 것은 속세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불행이라고 장자와 나비를 차별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의 정신분석 대가인 자끄 라깡은 “장자가 나비가 아닐까라고 의심이 드는 순간 장자가 무의식의 심연을 엿본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장자의 의도와는 무관하다. 「나비의 꿈」은 「망양문경(罔兩(もうりょう)問景)」에서 이어지는 일화 중의 하나이며, 이 모두는 소요유의 경지를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장자는 장자이며, 나비이며, 또한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관객은 천정에 투영된 하늘과 바닥의 거울에 비추어진 수면의 이미지 사이에서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당혹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당혹감을 당혹감 자체로 받아들여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원의 작품을 접할 때 우리들은 이와 같은「소요유(逍遙游)」의 경지를 마음으로부터 즐길 수 있는 것이다.